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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Martin Cirulis

소녀는 어둠 속에 무릎을 꿇고 앉아… 차디찬 바닥에 손바닥을 바짝 붙였다.

“하나… 둘… 셋, 넷. 달리지 마라, 기다려라.”

1킬로미터쯤 떨어진 칼란 약탈자 기지에 큰 소동이 났다. 병사와 기술자 수백 명이 일사불란한 혼돈 속에서 이동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아이가 있다니, 문명사회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아시스의 사회는 문명이라고 부를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조심해야 집에 간다.”

그렇지만 만약 그 아이가 약탈자 격납고의 진동이 공명해 바닥 판이 울리는 지점을 정확히 찾아낼 정도로 똑똑한 아이라면…? 아마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도 약탈자의 출격 현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르한 시커는 똑똑하기 그지없는 아이였다.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이런, ‘먼지 먹을’!”

갑자기 멀리서 장화 신은 발걸음 소리가 쿵쿵 울렸다. 어느 여인이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열 흔적 발견! 이쪽이다!”

르한은 부모님이 아직 쓰면 안 된다고 한 단어를 조용히 내뱉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언젠가 운이 다하는 시점은 오기 마련이다.

“열셋, 열넷, 보이지 마라! 움직일 수 있는 꼬마들은 틈으로 가고!” 르한은 2초 정도 꼼짝하지 않고 함선 출격의 진동이 멈췄는지 확인했다. 그리고는 폴짝 일어나 벽에 난 틈 속으로 뛰어들었다.

요즘 들어 칼란 약탈자의 순찰이 잦아졌지만, 르한은 저 노예 다루는 놈들이 오늘 허탕을 칠 것을 알고 어둠 속으로 빠르게 떨어져 갔다. 튀어나온 쇳덩이나 전력 없는 전력선이 얼굴 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소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했다. 구역에 가득한 관성 역장에 닿아 머리카락이 떠오를 때까지. 그리고 하강하며 침착하게 셋을 센 후, 정확하게 뒤에 나타난 거친 벽을 발로 밀었다. 그렇게 매끄러운 파이프로 들어간 르한은 사선 아래 방향으로 미끄러지며 수색대에서 멀어졌다. 파이프는 어둑하고 동굴 같은 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소녀는 손바닥과 발의 마찰력으로 속도를 줄여 안전하게 착지하고는 바닥을 살폈다. 걸을 때마다 쩍쩍 붙는 고무바닥에 한 가지 발자국만 찍혀 있다. 즉, 아무도 이 길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르한은 조용히 정찰용 연상 노래를 다시 흥얼거렸다. 맞춘 운을 세면 함선 수를 까먹을 일이 없었다. 오늘 우주가 얼마나 위험한지 킨 부족에 꼭 알려야 했다.

그래도 르한 시커는 잠깐이나마 여유를 가지고 뿌듯함을 느꼈다. 소녀는 작은 몸으로만 통과할 수 있는 공간과 틈을 내달리며 웃음을 꾹 참았다. 이것이야말로 자유였다. 이 순간, 투박한 보호구를 입은 약탈자들의 외침과 욕지거리가 뒤로 점점 사라지는 이 순간을 만끽하자. 오아시스와 자신만이 남은 이 순간을 즐기자. 부모님께 배운 바에 따르면 이곳은 옛날 옛적보다도 더 옛날에 지어진 ‘정거장’이나 ‘시설’이고, 여러 사람이 부족 킨과 함께 여기 찾아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중 다운사이더나 펑거스크롭퍼 같은 몇몇 무리는 거래해도 좋은 착한 사람들이지만, 러스트드링커 같은 무리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중에도 칼란 약탈자들은 최악이다. 르한은 저들이 싫었다. 태어날 때부터 약탈자를 피해 달아나는 법을 익힐 필요가 없었다고 해도. 저들이 일을 시킬 사람들을 사슬에 묶어 끌고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저 웃음소리와 비명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해도. 그래도 르한은 약탈자를 싫어했을 것이다. 저들이 오아시스를 다루는 태도만 봐도 싫었다.

약탈자는 오아시스가 방해물이나 적인 것처럼 행동했다. 저들은 오아시스를 자르고, 구멍을 뚫고, 알아볼 수 있는 기계는 전부 긁어모은 다음 알아보지 못한 것들은 갈기갈기 찢었다. 저들은 오아시스를 전리품처럼 다뤘다. 사슬에 묶어야 할 것처럼. 그래서는 안 돼. 오아시스는 집인걸. 게다가 오아시스는 그저 쇳덩이 따위가 아니다. 사람들이 안 믿어도 이것만은 사실이었다.

소녀는 잠시 멈춰서 케이블 다리에 거꾸로 매달렸다. 몸을 쭉 뻗자 아래 길목에 두껍게 쌓인 먼지에 손끝이 겨우 닿았다. 눈 깜짝할 새에 먼지에 ‘나쁜 길’ 표식이 그려졌고, 르한은 다시 다리 위로 올라왔다. 이걸로 한동안 이 길로 오는 포레저는 약탈자 기지 근처가 위험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르한 자신은 시커여도 포레저 친구들이 많아 포레저를 돌봐주는 걸 좋아했다. 아빠도 포레저였는데,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엄마한테 쇠파이프로 눈 사이를 딱 맞은” 후로는 바꿨다고 한다. 분명 좋은 일이 아닐 텐데, 아빠가 그 말을 할 때마다 엄마와 함께 미소 짓는 모습을 보니 뭔가 ‘어른의 지혜’ 같은 게 있나 보다 하게 되었다.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르한은 길을 빙 돌아간 다음, 넘어진 사다리를 잡고 한 손 한 손 나아가며 큰 콧노래 골짜기를 건넜다. 길고 단조로운 콧노래처럼 낮게 윙윙대는 소리가 발을 울렸다. 언젠가는 저 깊은 어둠 속에서 소리 내는 게 뭔지 알아볼 생각이다. 어딜 봐도 항상 새로 발견할 것이 있다는 것, 이런 게 바로 오아시스가 시커에게 주는 즐거움이었다. 골짜기 반대편에 다다른 르한은 대리석 회랑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대신 왼쪽에 있는 구불구불한 경사로를 올랐다. 발이 가벼운 사람은 이 길로 가는 편이 집에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르한은 오아시스를 동료처럼 믿지만, 그래도 그녀는 시커였다. 시커는 어떤 것도 그냥 믿지 않는다. 이곳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둠 속에는 사람을 파리쥐처럼 쉽게 잡아먹는 것들이 살았다. 그리고 가끔은… 그냥, 그냥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끔은 그냥 부족 킨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생겼다. 아쿠아소서나 크롭퍼 같은 안전한 일을 맡은 가족이라도 사람이 없어지는 일은 생겼다. 또 르한의 엄마가 종종 들려준, 르한 나이일 때 떠났던 긴 정찰 이야기도 있었다. 당시에 엄마는 해 들녘 지역에서 다른 부족 킨 구역에 들어갔었는데, 허락부름 신호를 제대로 보냈는데도 부족을 지키는 쉴드워든의 답신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엄마는 부족 생활 구역에 들어가 봤지만, 구역은 텅 비어 있었다. 식탁에는 음식이 썩고 있고, 가열기에 올려둔 주전자는 바싹 탄 데다, 목줄 채운 바퀴벌레도 굶어 죽어 있었다. 하지만 싸움의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이곳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끔은 그냥 일이 벌어진다. 요즘은 그런 일이 더 자주 벌어진다. 몇 회전 전에는 다른 아버지와 함께 이상한 일을 목격하기도 했다. 갑자기 시장 한가운데에 파란빛이 번쩍이더니 사람이 나타났다. 입고 있는 옷은 약탈자들이 밖에 나갈 때 입는 것과 똑같았지만, 더 깨끗해 보였다. 그 사람은 다음 순간 비명을 지르며 파란빛과 함께 다시 사라져버렸다.

오아시스 기준으로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약탈자들이 큰 함선들을 한꺼번에 내보냈다. 집에 돌아가서 보고하기 전에 그 이유를 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르한은 여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비밀을 찾아왔다.

유령공 속으로.

이곳은 한 주기 전에 조슈아 메카라이트 씨와 그의 아들이 회수 작업에 나섰을 때 따라왔던 곳이다. 수백만 개는 되는 작은 도관이 구체 벽을 만들어 반경 수백 미터는 될 구체 방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곳은 중력이 훨씬 낮고, 높이 올라갈수록 더 약해졌다. 재미있긴 했지만 조슈아 씨와 아들은 탐험에는 관심 없고 방의 쓰임새만 의논하고 있었다. 일이 다 끝나갈 때쯤에는 시커가 알아들을 수 없는 수준의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간신히 해석해 보니 여기에 어떤 커다란 프로세서가 있었을 걸로 추정되지만, 그게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제거됐는지는 메카라이트 부자조차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이후로 르한은 여러 차례 이 방을 찾아와 높디높은 방을 기어올라보곤 했다. 고대 유적 근처엔 속삭임들이 돌아다녔다. 대부분의 시커는 속삭임에 겁을 먹지만, 르한은 속삭임에 푹 빠져버렸다. 이것들은 오아시스의 일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오래되었지만, 너무 연약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 줘도 그저 조금 더 밝게 빛날 뿐이었다. 속삭임을 너무 좋아하면 운이 나빠진다고 했나? 그래도 유령공을 오를 때 주변에 있으니 심심하지 않아서 좋았다. 유령공 등반 연습 중엔 중력이 낮아 실수해도 크게 다칠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구체 표면에 뚫린 작은 구멍에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짚고 올라가는 방법은 오래 연습한 끝에야 알아낼 수 있었다. 이 방법으로 높이 올라가 보니, 위쪽 어두운 부분에서 구체 모양이 변했다. 도관 구멍은 위쪽 3미터 반경까지만 있었다. 그 위로 있는 매끄러운 은빛 표면은 만지면 손끝이 저릿해졌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르한은 지금 위치가 정확히 구체 밑바닥인지 다시 확인하고는 최대한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골라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는, 최대한 힘차게 위로 뛰어올랐다. 소녀가 고요한 공기를 가르며 날아올랐다. 그리고 다시 떨어질 만한 지점에 이르렀지만, 멈추기는커녕 계속 위로 떠 올랐다. 뛰는 힘과 위로 갈수록 약해지는 중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르한은 구체 윗부분을 향해 올라 은빛 천장에 거의 다다랐다. 소녀는 웃으면서 눈을 감고는, 활짝 편 손을 위로 뻗었다.

…접촉!

순간 르한 시커라는 이름의 아이의 의식은 케스라 오아시스라는 은빛 섬광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수천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시설 도안 속 통로와 장치, 스캐너, 운영 체계들이 모두 주목 알림과 명령 요청은 물론, 고장 난 시스템 수백만 개의 유지보수 요청까지 한꺼번에 보냈다. 그러다 안전 프로토콜이 작동해 모든 것이 멈춘 다음에야 시설은 결합 절차가 진행된 게 아님을 깨달았다. 상대는 인간/미성숙/거주민/르한시커/무해/친숙/신뢰가능 이었다. 양자적 일순 사이에 기계는 아이의 정신에 들어있던 정보의 단면들을 찾아 조심스럽게 모았고, 이를 다시 뇌 속에 넣고 인터페이스라는 안전장치를 건 다음, 인간 정신의 한순간이라는 영원을 기다렸다. 오아시스의 센서나 아직 남은 데이터 에이전트들이 수동적 상태로 열려 아이의 입력을 기다렸다.

모두가 르한 입장에선 찰나의 빛일 뿐이었다. 아이는 이제 막 예전에 알아낸 대로 손을 뻗은 참이었다. 오아시스는 안에 있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느꼈고, 르한은 그 점을 알았다. 소녀가 안다는 사실을 오아시스가 느낀다는 것을 소녀는 알았기 때문에, 르한은 예전에 알아낸 대로 손을 뻗었다. 이제 소녀가 오아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소녀의 생각이 복도와 격벽들을 순식간에 내달렸다. 겁도 없는 소녀의 물음에 정거장이 반응했다. 소녀는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며칠이나 밖에 안 나가고 쉰 탓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빠도 찾았다. 엄마가 집에 있어 즐거운 모습이었다. 소녀는 멀리 나와 부족 킨을 쭉 훑으며 언젠가 부족에 닥칠 사건들을 알아두었다. 르한은 몇 시간, 며칠이나 뒤에 찾아올 위험을 감지할 수 있었다. 오아시스가 관리하는 무시무시한 문과 오아시스는 모두 시간과 공간이란 개념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소녀조차 문 너머만은 감히 살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아시스가 관리하는 무시무시한 문과 오아시스는 모두 시간과 공간이란 개념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소녀조차 문 너머만은 감히 살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르한은 잔뜩 성이 난 붉은 벌집 같은 칼란 약탈자 기지를 탐지했다. 오아시스 옆을 찌른 창 같은 모양새의 기지였다. 긴장감과 흥분도 있었지만, 기지에 흐르는 감정은 대부분 공포였다. 누군가 이들을 찾아냈다. 이들처럼 싸우는 법을 배운 자였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약탈자의 큰 함선들이 위협에 맞서려 어둠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오아시스도 같이 탐지해봤다.

그리고 당황했다.

정말 뭔가 오고 있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함선인 동시에 사람인 무언가가. 오아시스와 비슷하지만 다른 무언가였다. 이건 호기심이 있다. 힘이 있다. 폭력이다. 그리고… 희망인가? 어쨌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르한은 즉시 연결을 끊었다. 주변에 모여든 미약한 속삭임들이 흩어지고, 그녀는 굴곡진 벽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왔다.
전쟁이 온다!

어서 부족 킨과 동맹에 알려야 한다. 오아시스 외곽에서 멀리 떨어진 안쪽으로 숨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무기는 이 집의 살갗을 뚫는다. 이미 그런 적이 있었다.

르한은 자신만이 낼 수 있는 속도로 오아시스 속을 달렸다.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알려야만 한다.

나는 시커니까.